임진왜란 김천 거창 우두령 전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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Writer AndyKim Hit 33 Hits Date 25-07-07 22:17Content
### 우두령 전투 개요
* **일시** : 1592 년 7 월 17 일(음 6 월 23 일)
* **장소** : 경북 김천시 대덕면 내감리와 경남 거창군 웅양면 경계 ‘우두령(牛頭嶺)’ 고갯길
* **교전 세력** :
* **조선 의병 2,000명** ― 총지휘 김면(金沔), 좌부장 황응남, 우부장 김준민, 복병장 이형, 종사관 곽준·문위
* **일본군 1,500명** ―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계통 부대 (제6진 잔여 병력)
* **전투 성격** : 산악 매복-기습전을 통한 보급로 차단 작전 ([gimcheon.grandculture.net][1]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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## 1. 전략적 배경
임진왜란 초기, 왜군 제6진은 경상 우도(현 김천·거창 일대)에 흩어져 **전라도 진입** 을 노리고 있었습니다. 그러나 곽재우·김면 등 의병에게 진출로를 차단당하자, 거창·무주 방면 우회로(우두령 → 무주 구간)를 택합니다. 의병 지휘부는 “우두령에서 막으면 호남로가 완전히 닫힌다”고 판단해 선제 매복을 결정했습니다. ([gimcheon.grandculture.net][1]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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## 2. 지형 · 배치
우두령은 해발 약 680 m의 V자형 마루로, 양쪽 사면이 급하고 길이 좁아 **행군 대열이 늘어질 수밖에 없는** 길목이었습니다. 김면은 양편 능선과 고개 윗마루에 부대를 3층으로 배치하고, 산척(山尺·산간 사냥꾼)들을 척후로 삼아 활·장궁 지원사격을 준비했습니다. ([gimcheon.grandculture.net][2]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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## 3. 전투 경과(타임라인)
| 시각 | 전개 | 결과 |
| ----------- | --------------------------- | ---------------------- |
| **07 : 00** | 왜군 선발대 고개 진입 | 의병, 은밀히 대열 길이·무장 확인 |
| **08 : 30** | 본대가 고개 정상에 올라섰을 때 **봉화 신호** | 좌·우 능선 매복군 일제 사격·낙석 투하 |
| **09 : 00** | 기습 1차 성공 후, 황응남 · 김준민이 돌격 | 왜군 중앙 대열 붕괴, 퇴로 혼란 |
| **10 : 00** | 복병장 이형, 후미 차단 중 전사 | 후위 왜군 일부 탈출 성공 |
| **정오** | 나머지 일본군 산중 도피·패주 | 왜군 전사·포로 다수, 의병 피해 경미 |
※ 기록마다 전과 차이가 있으나 『김천시사』는 “적 1,500 중 절반 이상 전사·포획”으로 서술합니다. ([gimcheon.grandculture.net][1]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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## 4. 전투 결과와 의의
1. **전라도 축선 차단**
우두령이 막히면서 왜군 제6진은 더 이상 호남으로 내려가지 못하고, 지례·김산 일대에서 고립됐습니다. 후방 보급로가 끊기자 곧장 서·남부 공세가 주춤해집니다. ([gimcheon.grandculture.net][1])
2. **의병 연합 승리 모델 제시**
김면(충청 의병)·황응남(상주 관군)·거창 선비군 등이 지휘 체계를 통합해 ‘지역 연합전’ 가능성을 보여 주었습니다.
3. **산악 매복전의 교과서**
좁은 고개를 ‘깊이 매복–높이 타격–퇴로 차단’ 3단계로 운용한 대표 사례로 평가됩니다. 산척 사수(射手)들의 궁시 지원도 기록에 자주 언급됩니다. ([gimcheon.grandculture.net][1], [gimcheon.grandculture.net][2])
4. **인물 재평가**
황응남은 제포만호 시절 패주 오명을 이 전투로 씻었고, 김준민은 대궁(大弓) 사격 공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. 복병장 이형은 순절해 현지에서 제향을 받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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## 5. 현장과 유적
* **우두령 옛길** : 국도 3호선이 개통되기 전 김천-거창 사이 최단로. 현재는 농로 수준이지만 고개 마루와 매복지 추정지점에 표석이 남아 있습니다.
* **전승비** : 김천시 대덕면 연화리 시비공원 내 ‘우두령 의병승첩비’(1999)
* **답사 포인트** : 고개 정상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는 급경사길(옛길 흔적)과 능선 자연 낙석대를 함께 보면 매복 지형을 이해하기 쉽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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## 6. 한눈 정리
> **우두령 전투(1592.7.17)** 은 김천 의병 2,000명이 험준한 고개에서 일본군 1,500명을 기습-포위하여 **호남 진격로를 끊어 낸 산악 매복전**입니다.
> 작지만 결정적인 승리 덕에 경상 서북부-전라도 방어선이 살아남았고, ‘지역 의병 연합+지형 활용’ 전술이 최초로 빛난 전투로 기억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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### 참고 문헌·자료
* 『김천시사』 (김천시, 1999)
* **디지털김천문화대전** 〈우두령 전투〉, 〈우두령〉 항목 ([gimcheon.grandculture.net][1], [gimcheon.grandculture.net][2])
* 김천시 대덕면사무소 〈지명유래·우두령〉 ([gc.go.kr][3])
궁금한 점이나 영상 / 자막 형식 요약이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!
[1]: https://gimcheon.grandculture.net/gimcheon/toc/GC03200482 "우두령 전투 - 디지털김천문화대전"
[2]: https://gimcheon.grandculture.net/gimcheon/toc/GC03200103?utm_source=chatgpt.com "우두령 - 디지털김천문화대전"
[3]: https://www.gc.go.kr/district/daedeok/contents.do?mId=0204000000&utm_source=chatgpt.com "지명유래 - 김천시 대덕면"
* **일시** : 1592 년 7 월 17 일(음 6 월 23 일)
* **장소** : 경북 김천시 대덕면 내감리와 경남 거창군 웅양면 경계 ‘우두령(牛頭嶺)’ 고갯길
* **교전 세력** :
* **조선 의병 2,000명** ― 총지휘 김면(金沔), 좌부장 황응남, 우부장 김준민, 복병장 이형, 종사관 곽준·문위
* **일본군 1,500명** ―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계통 부대 (제6진 잔여 병력)
* **전투 성격** : 산악 매복-기습전을 통한 보급로 차단 작전 ([gimcheon.grandculture.net][1]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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## 1. 전략적 배경
임진왜란 초기, 왜군 제6진은 경상 우도(현 김천·거창 일대)에 흩어져 **전라도 진입** 을 노리고 있었습니다. 그러나 곽재우·김면 등 의병에게 진출로를 차단당하자, 거창·무주 방면 우회로(우두령 → 무주 구간)를 택합니다. 의병 지휘부는 “우두령에서 막으면 호남로가 완전히 닫힌다”고 판단해 선제 매복을 결정했습니다. ([gimcheon.grandculture.net][1]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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## 2. 지형 · 배치
우두령은 해발 약 680 m의 V자형 마루로, 양쪽 사면이 급하고 길이 좁아 **행군 대열이 늘어질 수밖에 없는** 길목이었습니다. 김면은 양편 능선과 고개 윗마루에 부대를 3층으로 배치하고, 산척(山尺·산간 사냥꾼)들을 척후로 삼아 활·장궁 지원사격을 준비했습니다. ([gimcheon.grandculture.net][2]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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## 3. 전투 경과(타임라인)
| 시각 | 전개 | 결과 |
| ----------- | --------------------------- | ---------------------- |
| **07 : 00** | 왜군 선발대 고개 진입 | 의병, 은밀히 대열 길이·무장 확인 |
| **08 : 30** | 본대가 고개 정상에 올라섰을 때 **봉화 신호** | 좌·우 능선 매복군 일제 사격·낙석 투하 |
| **09 : 00** | 기습 1차 성공 후, 황응남 · 김준민이 돌격 | 왜군 중앙 대열 붕괴, 퇴로 혼란 |
| **10 : 00** | 복병장 이형, 후미 차단 중 전사 | 후위 왜군 일부 탈출 성공 |
| **정오** | 나머지 일본군 산중 도피·패주 | 왜군 전사·포로 다수, 의병 피해 경미 |
※ 기록마다 전과 차이가 있으나 『김천시사』는 “적 1,500 중 절반 이상 전사·포획”으로 서술합니다. ([gimcheon.grandculture.net][1]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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## 4. 전투 결과와 의의
1. **전라도 축선 차단**
우두령이 막히면서 왜군 제6진은 더 이상 호남으로 내려가지 못하고, 지례·김산 일대에서 고립됐습니다. 후방 보급로가 끊기자 곧장 서·남부 공세가 주춤해집니다. ([gimcheon.grandculture.net][1])
2. **의병 연합 승리 모델 제시**
김면(충청 의병)·황응남(상주 관군)·거창 선비군 등이 지휘 체계를 통합해 ‘지역 연합전’ 가능성을 보여 주었습니다.
3. **산악 매복전의 교과서**
좁은 고개를 ‘깊이 매복–높이 타격–퇴로 차단’ 3단계로 운용한 대표 사례로 평가됩니다. 산척 사수(射手)들의 궁시 지원도 기록에 자주 언급됩니다. ([gimcheon.grandculture.net][1], [gimcheon.grandculture.net][2])
4. **인물 재평가**
황응남은 제포만호 시절 패주 오명을 이 전투로 씻었고, 김준민은 대궁(大弓) 사격 공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. 복병장 이형은 순절해 현지에서 제향을 받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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## 5. 현장과 유적
* **우두령 옛길** : 국도 3호선이 개통되기 전 김천-거창 사이 최단로. 현재는 농로 수준이지만 고개 마루와 매복지 추정지점에 표석이 남아 있습니다.
* **전승비** : 김천시 대덕면 연화리 시비공원 내 ‘우두령 의병승첩비’(1999)
* **답사 포인트** : 고개 정상에서 북쪽으로 내려가는 급경사길(옛길 흔적)과 능선 자연 낙석대를 함께 보면 매복 지형을 이해하기 쉽습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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## 6. 한눈 정리
> **우두령 전투(1592.7.17)** 은 김천 의병 2,000명이 험준한 고개에서 일본군 1,500명을 기습-포위하여 **호남 진격로를 끊어 낸 산악 매복전**입니다.
> 작지만 결정적인 승리 덕에 경상 서북부-전라도 방어선이 살아남았고, ‘지역 의병 연합+지형 활용’ 전술이 최초로 빛난 전투로 기억됩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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### 참고 문헌·자료
* 『김천시사』 (김천시, 1999)
* **디지털김천문화대전** 〈우두령 전투〉, 〈우두령〉 항목 ([gimcheon.grandculture.net][1], [gimcheon.grandculture.net][2])
* 김천시 대덕면사무소 〈지명유래·우두령〉 ([gc.go.kr][3])
궁금한 점이나 영상 / 자막 형식 요약이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!
[1]: https://gimcheon.grandculture.net/gimcheon/toc/GC03200482 "우두령 전투 - 디지털김천문화대전"
[2]: https://gimcheon.grandculture.net/gimcheon/toc/GC03200103?utm_source=chatgpt.com "우두령 - 디지털김천문화대전"
[3]: https://www.gc.go.kr/district/daedeok/contents.do?mId=0204000000&utm_source=chatgpt.com "지명유래 - 김천시 대덕면"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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